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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 흰 바람벽,

가을이 오면 석류꽃 피겠지.



마실을 다녀온 엄마가 말했다. 석류나무를 가져왔다고.
이번 가을이 되면 석류를 먹을 수 있으냐고 물으니, 엄마가 답했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릴 시간이 필요하니, 이번해는 기대하지 말라고.
그래도 석류꽃이 필때를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흙과 함께 삶을 꾸려 가는 사람들에겐 기다림이 낙이 아닐까 싶어졌다.

엄마는 오랜만에 텃밭일을 했다. 비닐도 씌우고 감자도 심었다.
그 곁에 오랜만에 나도 있었다.
비 내린 다음날 차게 부는 바람이 좋았다.
봄이면 내가 좋아하는 연분홍빛 살구꽃이 피겠다. 이렇게 봄이 오는구나.

오늘 지나가는 생각으로 농사나 지으며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
그럴 자신이나 있나 싶어 피식 웃었다.

결정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두고 엄마는 석류 나무를 심었고, 나는 이곳의 가을을 기다린다.
떠날지도 모르는 곳에 강아지를 한마리 두면 어떨까. 집에 돌아다니는 도둑고양이를 키울까. 하는 생각도 한다.
쉽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 사람이 터를 잡고 30년을 산 곳을 떠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시간을 기다리기로 한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두달 밖에 되지 않았다.
두달 전엔 내가 전화를 하면 온 몸의 힘을 모아 밝게 내 이름을 부르던 한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
날이갈수록 흐릿해지는 기억과 냄새와 잦아드는 슬픔같은 것 때문에 머리를 흔들어가며 생각하려고 한다.

아빠가 이발소에 갔다오면 나던 그 특유의 냄새가 가끔 그리웠는데, 그 냄새가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고 있다.
시간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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