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든 생각 때문에 오싹해진다.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그 순간을 지나왔나 생각하고 있다. 이제 내것이 된 오른 발의 상처를 생각하며. 다시 다가오는 수술을 생각하면서. 멋모르고 수술까지하고 깁스도하고 실밥도 풀고 지금처럼 걷기까지의 시간이 꿈같다. 아직도 발을 감싸쥐면서 내가 다쳤다고? 묻기도 한다. 아문 상처가 대답을 대신해준다. 그래 니가 이렇게 다쳤어. 하고.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못할 때는 철심을 박든 뭘하든 두려움이 덜했는데 겪고 나니 다가오는 시간이 두렵다. 그냥 다시 눈 뜨면 참 길고 어둔 꿈이었다하고 빨리 잊고 싶다고 생각해버리면 될 것 같은데. 오른쪽 검은 선은 계속 이게 진짜야. 더 이상 깰 꿈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상처.
내 오른손에도 작지 않은 상처가 있다. 엄지와 검지 사이. 기억의 골처럼 짧지 않은 상처가.
나는 농사를 짓는 사람의 딸이었고 그 날은 아빠를 따라 집 앞 밭에 나갔다. 나는 어렸고. 탱자나무 아래 서있었다. 아빠는 멀리로 갔다 다시 돌아오고 또 어디깨까지 갔다 돌아왔다.
날은 맑았고. 혼자 지루해질 무렵 아빠는 일거리를 주었다.
밭두렁에 비닐을 씌워야하니 막대만 잡고 있으라 한다.
나는 내 키만한 삽자루 반대편에 선다. 아빠는 비닐 동트레에 긴막대를 끼고 한쪽은 삽자루에 끼고 한쪽은 나를 준다. 잘잡고만 있으면 된다고. 내심 당부를 하고 비닐 끝을 잡아 끌고 멀리로 간다.
돌돌돌. 하고 아빠의 걸음에 맞춰 비닐이 풀려나가고. 나는 그것이 신기해 잡아 끄는 아빠와 풀려가는 비닐을 보는데. 이것이 굴러 굴러 내 손으로 온다. 움직이는 쪽으로. 자꾸만 나에게로 온다. 잡고 있으라하니 놓지는 않고.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간다. 자꾸 멀어져 조그맣게 아빠. 아빠. 하는 내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결국 이 비닐의 동트레는 내 손을 갈기 시작한다. 나는 아픔보다. 뜨거움을 느낀다. 불도 아닌데 뜨거워 나는 당황한다. 그래도 아빠는 계속 나아가고 동트레는 쉼없이 돌아가고 이젠 붉은 피가 손을 감싸니 무서워 울기 시작하고 저 멀리로 가던 아빠는 그제야 멈춘다. 나는 아직도 막대를 놓지 않고 뜨거워 운다. 멀리서 아빠가 달려온다. 밭이랑이든 두렁이든 닿는 것이 무엇이든 밟고 온다. 그래도 나는 쥔 막대를 놓지 않고 뜨거워 운다.
피가 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아이의 손에 아빠의 땀도 침도 줄줄 흐르고 잡게 했던 막대기도 비닐동트레도 집어 던지고 아이를 안아 집으로 달려 간다.
달려 갔을 것이다.
그리곤 이젠 할머니 등에서 운다. 우는 내 손엔 흰 면이 감겨져 있고 이내 또 시뻘겋게 젖어들어 그 색 때문에 난 또 운다. 할머니는 당황해 가던 길도 잃고. 치맛자락에 붙는 도둑 가시 밭도 그냥 달린다.
또 어느새 손에 흰 가루가 뿌려지고 빨간약도 바른다. 이젠 눈물은 멈추고 나는 멍하다.
시간은 또 어느새 밤이다.
엄마는 하필이면 밥 먹는 손에 누구든 잘보이는 곳에 상처를 입혔냐고 아빠를 타박한다. 아이가 뭘 안다고 일을 시키냐고. 그리곤 나에게 왜 놓지 않았냐고 몰아세우다 이내 상처가 깊을까 걱정한다. 상처가 되면 안되는데.하고.
시간이 지나도. 이젠 다 아물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쯤에도 상처가 되면 안되는데.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다 이젠 결국 이렇게 상처가 되었구나. 한다. 그때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잡고만 있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말한다.
그냥. 뜨겁기만 했으니까. 이게 상처가 될지는 몰랐으니까.
그 상처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기까지. 누군가 이 상처에 대해 묻기 전까지 이것이 상처인지도 모를 때까지의 시간은 참 길고 오래였다. 내가 그 날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낼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이니까.
가끔 오른발에 생긴 상처를 인식하지 못하기 까지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참 오래고. 긴 시간이겠지.
그 긴 시간이면 상처난 발을 보며 울적해지지도 않겠지. 그래 모든 게 처음 비슷하게 되겠지. 말하기 전까지 내가 먼저 생각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