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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 흰 바람벽,

다 거짓말 같아.


집에 돌아가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씻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가만히 누워서 밖에 소리를 듣는 것. 어제 조금 다른 게 있었다면 화분을 두개나 들여놓은 것, 창에 두개를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여태 집에 살아 있는 것이 없었구나. 나만 귀신처럼 스윽 스윽 다니고 있었구나. 말소리도 없고, 생기하나 없이.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후 방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엄마가 놓아둔 그대로 하나 손 대지 않았다. 칫솔도 그대로. 집었다 놓아둔 종이 가방도 그대로. 벗어둔 옷도 그대로. 그렇게 며칠을 살았다. 그리고 어제 싱크대 위가 허전해 뭐가 없나 생각하다가 간장도, 식초도, 올리브유도 아무것도 없어 어디있지 싶어 선반 문을 여는데 거기 다 넣어져 있다. 그때쯤에야 어렴풋이 이른 아침에 밥도 하고, 국도 끓이던 엄마가 그 작은 주방에 앉아 무얼 하나 했더니, 이걸 넣고 있었구나 싶었다.
처음 집을 나와 살게 되고 그 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갔을 때. 엄마는 부엌이 낯설어 그릇을 씻다 말고, 물한잔 따르다 말고 그냥 가만히 방으로 가 앉아 있었는데, 이젠 그런 어색함은 없구나. 내가 절간같은 방에서 외로움에 적응하는 동안, 엄마도 조금 달라졌다.

살아가는 게 거짓말 같다. 나이를 먹는 것도. 얼굴에 조금씩 주름이 자리를 잡는 것도. 내가 이렇게 걷고 말하고 어딘가에 적응을 하고,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아프고, 상처받고 이런 것들이 그냥 남의 이야기처럼 낯설다. 그리고 정말 다 거짓말 같다. 내가 여태 살아왔던 날들이 그냥 꿈같고, 앞으로 겪어야 하는 일들이 그냥 다 남의 이야기 같아서 어제는 내 새끼 손가락 위에 피어난 구름처럼 그냥 어정쩡했다.

그리고 그냥 글을 쓰고 싶어졌다. 어떤 단어라도 쓰고 싶어서 어떤 말이든 머릿속에 떠올려봤는데, 아무것도 글이 되진 않았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말했지만 고작 비내리는 점심시간에 무엇이든 끄적거린다.

<아이가 물었다. "엄마 왜 사랑하는 사람들은 닮아가?"
엄마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좋아하면 따라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래서 닮아가는 건 아닐까.?" 하고 말했다.
"현서도 엄마, 아빠를 사랑하니까. 말투도 닮고, 얼굴도 닮고, 그렇잖아."
아이는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엄마는 현서의 얼굴을 보다가 아이 방으로 들어가 검은 도화지를 가져와 반으로 접어 가위질을 했다.
"사랑이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물감을 쥐어주며 하트표의 한쪽에만 물감을 짜보라 했다. 검은 하트 에 점이 찍히고, 줄이 그어졌다. 엄마는 한쪽에만 색이 가득한 도화지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곤 그 도화지를 꾹꾹 누른 다음 펼쳐보여주었다.
"현서야. 이게 사랑이 아닐까?"
그제야 아이는 물음이 풀린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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