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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 흰 바람벽,

이렇게 적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나의 이 글은 그의 유년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결함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무전망(無展望)한 비극적 세계관이 그의 문체와 결합되는 부분을 역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결함을 갖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주었으면 한다.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극장.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그의 검은 눈썹과 노래 잘하던 아름다운 목청이 흙 속에서 이제 썩고 있는 모습도 지금 내 눈에 보인다.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 선배가 되었구나. 하기야 먼저 가고 나중 가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너의 관을 붙들고 "이놈아 거긴 왜 들어가 있니. 빨리 나오라니깐" 하고 울부짖던 너의 모친의 울음도, 그리고 너의 빈소에서 집단최면 식의 싸움판을 벌인 너의 동료 시쟁이들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空이 되거라. 네가 간 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

 

기형도 詩의 한 읽기. 김훈

 

 

 

이 글을 접한지도 몇년이 흘렀다. 소설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는 이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고, 낭독해주셨다.

그 낮고 굵은 목소리.

이제는 뿌옇게 선명하지 않은 강의실의 풍경들.  

 

한동안 이 프린트물은 내 방 책상 옆에 붙여져 있었다. 노란색 줄이 몇 군데 쳐져 있었고,

책상에 앉아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다 벽에 붙은 그 문구를 읽기도 했었다.

 

 

 

 

 

 

내가 분명 지나온 시간들인데, 거짓말 같이 생각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누군가 가져갔다고 생각했던 책이 고대로 내 책장에 꽃혀있다. 나는 분명 그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빌려준 적이 없는건지, 가져가지 않은 건지, 그 책이 아닌 건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책을 그 자리에 두고 간것인지.

생각하면 어렴풋이라도 기억나기 마련인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란 이토록 나를 하찮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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